1. 흙수저가 부자 되는 길
얼마 전, 카페의 회원으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들었다. “저도 대표님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소자본투자연구소 카페에 있는 나의 글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진심어린 말을 한 것이다. 나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왔기 때문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나도 고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부족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든든한 부모며, 물려받은 자산이며, 가지고 태어난 것이 많은 사람들이 기댈 언덕조차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분명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행운아다.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들이 해야 할 고생들을 적어도 덜 하거나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돈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기게 되는데 물려받은 돈도 그렇다. 흔히들 금수저, 흙수저라고 하면서 신세한탄을 하고는 하지만 나는 금수저로 태어난 분들의 가장 큰 혜택은 바로 자신감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빈곤하게 자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신감이 없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의 모습이 그랬다.
나는 돈을 벌고 나서도 한동안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수십 년간, 더욱이 어린 시절을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버릇을 고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돈이 너무 벌고 싶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좋은 옷을 입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나는 나를 찾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유년시절 나는 꽤나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 선생님마저 “너는 내가 포기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나는 활발하다 못해 지나치게 장난끼가 심했다. 인기도 남자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많았다. 다만 나는 장의사 집, 폐가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이것이 부끄러운 부분이라는 것을 느끼고나서부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의 집이 장의사집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집 근처에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혹시나 친구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한참을 살펴보다가 아무도 없을 때, 기회를 노려서 달려서 최대한 내가 사는 집을 들키지 않게 애썼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친구들이 우리 집을 볼까봐 가장 먼저 뛰어서 집으로 향했다. 나는 학교가기가 너무 싫었다. 학기 중에는 매일 그렇게 우리 집이 장의사집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달려야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 장의사집이 부끄럽다고 다른 간판을 걸자고 말을 했지만 돈이 없다고 바꿔주지 못하셨던 것 같다. 사실 아버지조차 어머니에게 수천만 원의 빚과 4남매의 육아를 떠넘기고 도망가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쉽게 드릴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장한 어린이라고 공부도 못하는 나에게 장학금을 주는데 친구들은 모두 우리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에 내가 장학금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몇 푼 안 되는 장학금을 받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이게 얼마라고 내가 부끄러워야하지?’ 모두가 알다시피 학교입장에서는 장학금을 줄 때 최대한 생색을 내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시상식을 한다. 나는 장학금을 모두 어머니께 드렸다. 장학금을 줄 때만 보아도, 적어도 나에게 있어 학교는 교육의 본질을 잘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나도 기부를 하고는 하지만 적어도 좋은 마음에서의 기부를 한다면 익명으로 하든 뭐로 하든 상관없는 것이 보통이다. 시상식까지 하며 불우이웃 장학금을 주는 것은 사실상 명예를 위한 지출이지, 순전히 도와주려는 배려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철저한 흙수저로 태어나서 부자가 되고 싶었다. 이제는 할머니 소리를 듣는 어머니께 나는 조금 더 빠른 은퇴를 선물해드리고 싶었다. 나의 어머니는 4남매를 혼자 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하셨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승주야 너희 엄마 노후준비가 안됐다”라시면서 신신당부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실제로 그랬다. 어머니는 남의 밭에 농사를 도와주시면서 받은 일당으로 4남매를 키우셨다. 하루는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와주러 간 누나가 “그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해요”라고 말을 했다. 누나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었다. “나는 어머니를 지킬 것이다” 외할머니께 어머니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노후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수십 번씩 말해도 마음에 남으셔서 그런지 나에게 “우리 외손 착하다. 엄마 좀 잘 부탁한다”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바람에서인지 나는 또래보다 잘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돈이 무엇인지 한 번 성공하고 나니까 없던 자신감도 생겼다.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춤도 추고 조금씩 내 자아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만 놀랐던 것은 나는 나름대로 자신감이 넘쳤는데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내가 눈치보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을 듣곤 했다. 어려워한다고 핀잔섞인 말도 듣곤 했다. 그게 사기꾼 거지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 매우 언짢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에서 생각해보아도 내가 눈치를 보는 버릇을 못 고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 이 버릇을 고치고 싶었다. 흙수저로 태어났기에 남은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 내면에서는 내가 최고라고 되뇌이곤 했지만 실제 내가 조금이라도 정을 주었던 사람들을 어려워하는 것이 스스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항상 남자다워지고 싶었다. 남들 못지 않게 성공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해왔기 때문에 못해도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
외부의 평가에 영향을 받는 나를 스스로 느끼면서 짜증이 났다. 나는 그럴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배고픔보다 돈 때문에 비굴해진 나의 모습에 화가 났다. ‘차라리 학교를 다니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빨리 독립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많다. 가난이란 나에게 적어도 못 먹고 못 입는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왜 나를 고아원에 보내지 않았냐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죄송하고 막돼먹은 놈의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심이었다. 한동안 너무 괴로웠다. 그럴수록 나에게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돈을 왜 벌어야 하는지’, ‘돈을 벌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깨진 유리병에 찍힌 자국도 있고 칼에 맞은 흉터도 있다. 아프기도 많이 아팠지만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당시의 고통이 떠오른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너무 억울했다. 다 돈 때문이었다. 차라리 평범하기라도 했다면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이었다. 내가 이런 상처가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고생을 하는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라지만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상처였다.
나는 흙수저로서 자수성가하기 위해서 살아온 스토리를 말하면 정치와 종교 부분에서 억울한 것이 많은 편이었다. 이 부분은 나의 성공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아직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할 때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다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기개발에 관련한 교육을 받으러 갈 때에도 그러니 생각보다 많은 손해를 봤다. 좋은 스승을 만나도 해당 분야에 조언을 구하기보다 정치, 종교에 대한 상담을 많이 요청하곤 했다. 좋은 스승을 만났는데 내가 그 기회를 제대로 잘 살리지 못한 것이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남들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 나의 저서 “내 안의 요술램프를 깨워라”에서도 나오지만 20대 초반의 나이부터 억대연봉을 넘어서면서 내 분야에서는 꽤나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는데 사업도 확실히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3년 정도 쉬어버리면 누구라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내 실력이 없어서 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3,4년만에 완전히 망했다. 다시 회복하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괴롭다는 것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단지 하늘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살아냈다. 소득을 회복하는 동안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반드시 잘 될 것이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또 다시 열정을 불태우면서 나는 흙수저가 조금 더 효율적으로 부자 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남들보다 적게 일하면서 많이 벌어본 나로서는 부자 되는 길도 이런 쉬운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흙수저가 남들보다 쉽게 부자 되는 길 말이다. 사실상 나는 그때 돈을 버는 방법만 알았지, 돈을 불리는 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주식 투자도 그렇고 부동산 투자도 그렇고 대리인을 통해서 진행하다가 별 소득 없이 끝난 것이 다였다.
재테크의 중요성을 느끼고 나는 돈을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했다. 돌아보니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과정을 어떤 것으로 하든 결국 재테크의 끝은 부동산이었다. 부동산만큼 나의 재산을 잘 지켜주는 수단이 없었다.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며,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그런 확실한 투자처는 분명히 부동산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부동산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부동산을 시작한지 이제는 꽤 되었지만 부동산 재테크는 하면 할수록 ‘세상에 이만한 재테크가 없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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