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 부모님은 신용불량자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장의사집 폐가였다. 부모님은 신용불량자로 하루가 멀다하고 빚쟁이들이 돈을 받으러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는 낮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부하직원들에게 자주 밥을 사시는 등 과도한 지출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그것도 외상으로 밥을 사셔서 외상을 식당 주인들마저도 우리 집으로 빚을 받으러 찾아왔다.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술에 취해 어머니께 손찌검하셨다. 누나들은 그런 아버지를 울면서 막아내려고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서 울면서 아무것도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도 않았을 무렵, 부모님은 나를 키우는 것이 부담이 되셨는지, 할아버지댁에 나를 맡기셨다. 그당시 부모님이 주신 컵라면 하나도, 자기가 먹지 않고 나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 집은 가난했다. 정부에서 주는 쌀밥에 간장, 참기름, 김치를 먹으면 정말 잘 챙겨먹는 것이었으니, 그때 왜 할아버지댁에 나를 맡기셨는지 지금은 이해가 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와 누나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셔서 철없는 나의 행동을 잘 받아주셨다. 지금은 천국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너무 감사하다. 나는 그때 부모님과 누나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얼마 후, 누나도 할아버지댁으로 맡겨졌다. 그렇게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나와 누나는 다시 부모님이 계시는 우리 집으로 갔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가난했고,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이성을 잃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에서 졸업하기도 전에 자식 4명과 그 당시 수천만 원의 빚을 어머니께 남기고 집을 나가셨다. 내가 갓 10살이 될 무렵이었다. 나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빚쟁이들에 시달렸고, 우리 자식들을 버리지 않으시려고 돈을 빌리러 친척들에게 전화를 하셨다. ‘이러다 길에 나앉게 생겼다’라고… 나는 그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우리 집이 다른 친구들보다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 선생님이 부모님의 직업을 적어오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친구 중 한 명은 자기 아버지의 직업이 농부라서 그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작은 시골마을이었던 터라 농부가 흔했다. 나는 우리 집이 장의사집이라고 해서 장의사라고 적었더니 몇몇 친구가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친구들이 웃어대는 이유를 몰랐다. 나는 나중에서야 장의사가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이 폐가에 사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폐가인 우리 집 대문에는 ‘장의사’라고 떡하니 광고용 스티커가 붙여져 있어서 너무 부끄러웠다. 작은 시골 동네에는 사람을 마주치면 모두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밖에 누가 없는지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그것도 누가 볼까봐 재빨리 뛰어갔다. 나는 어머니께 저 장의사 스티커라도 떼자고 했다. 어차피 아버지가 없으니 말이다. 기억은 잘나지 않지만 그 뒤로도 10년 가까이 우리 집 대문에는 장의사라고 광고용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원래 꽤나 활발해서 선생님도 포기한다고 했을 정도였던 내가 점점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열심히 남의 밭에서 일을 해주고, 그렇게 받은 100만 원이 안 되는 월급으로 우리 자식들을 키우셨다. 우리를 더 신경 못 써주시는 것이 당연했다. 100만 원 안 되는 월급으로 여자 혼자서 자식 4명을 밥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도 큰 일이었다. 어린 시절 공과금을 못내기 일쑤였던 우리 집이라, 나는 돈을 아끼려고 겨울철에도 찬물에 샤워를 했다. 한번 샤워하는 것이 그 시절에는 큰일이었다. 어쩌면 고시원 생활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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